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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에 대한 불안

블룸 이전의 문학이론이 “후배 작가가 선배 작가를 모방하는 문학 전통의 연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해왔다면, 블룸 이론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아닌 ‘왜곡’과 ‘차이’ ‘오역’에 주목한다. 블룸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 즉 선배 작가의 모방이 아니라 선배 작가의 모방을 넘어서 능가하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시적 오류’라는 창조적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갈등과 투쟁의 미학이라고 지칭한다.

다시 말해 후배 시인들은 위대한 선배 시인의 ‘영향’이라는 방해자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스스로 독창적인 시인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배 시인은 선배 시인을 흠모하고 추앙하면서 모방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려면 선배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안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후배 시인은 선배 시인의 문학적 특권을 수정하고 이탈하고 구분하려는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블룸은 그 때문에 모든 선배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서가 “은폐 또는 오독”일 수 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오독은 “약한 오독(weak misreading)과 강한 오독(strong misreading)“으로 나누어지는데 약한 오독은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반면 강한 오독은 독자의 시각에 비추어 창조적으로 오독하는 것이다. 블룸은 이러한 창조적 오독으로 작품에 지지않는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하고, 독창적인 의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오독으로부터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으로부터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블룸은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6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1. 클리나맨 - 젊은 시인이 선배 시인의 작품을 잘못 해석하거나 왜곡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시작을 시작한다.
  2. 테세라 - 선배의 작품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3. 케노시스 - 선배의 언어와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비우고 새로운 것을 채운다.
  4. 악마화 - 선배의 위대하고 숭고한 면에 반발하여 더 과장된 상상력을 드러낸다.
  5. 아스케시스 - 선배에 대한 반발이 자기 성찰과 고독으로 이어진다.
  6. 아포프라데스 - 마지막에는 젊은 시인이 선배를 인정하고 포용하지만, 영향력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독창적인 작품을 완성한다.

블룸이 설명하듯, 예술가는 선대 예술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때론 그들을 모방하려 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쓰고자 할 때 이 영감은 장애가 된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대조하거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어지지만, 성공적인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하여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비워내는 과정이다.

시인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글을 쓸 때도, 멋있는 글귀를 베끼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어려운 말들로 문장을 억지로 늘린 적도 있다. 하지만 좋은 글은 결국 있어보이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말만을 간결하게 쓰는 것이다. 나를 사로잡은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나’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더욱 나로서 있을 수 있다.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어디까지이고, 어디부터 나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확실히 구분하는 방법은 없겠지만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더 나은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