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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생각하는 하리 할러라는 인물의 체험을 담은 소설이다. 수기에 따르면 그의 내면에서는 ‘이리’와 ‘인간’이 서로 반목하는데, ‘인간’의 정신적인 관심, 윤리적·미학적 이상들, 고상한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고의 속에 있는 ‘이리’는 가식적이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낙인찍고 인간을 경멸한다. 반대로 그의 속에 있는 ‘인간’은 길들여지지 않고 인간을 경명하며 공동체에서의 삶, 예술과 문화에의 참여를 거부하는 거친 이리의 야성을 비난한다. 하리 할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서 낯선 감정을 느끼며 고독한 방황을 하는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부른다. 현대 문명과 기술의 발전에 혐오를 느끼는 그는 시민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시민 계층의 평온과 안정을 동경하면서도 만족감과 평범한 삶을 경멸하고 견딜 수 없어한다.

그러다 하리 할러는 ‘황야의 이리에 대한 소논문’이라는 책자를 발견하는데, 그 책자는 하리 할러가 가지고 있는 내면적 갈등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 소논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황야의 이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거짓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이분법적으로 임의에 의해 구분된 것이고, 고통의 원천이 되는 모순을 왜곡시킨 것에 불과하다.

하리는 자신 안에서 하나의 ‘인간’, 즉 사상과 감정, 문화의 세계에 길들여진 숭고한 본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한 마리의 이리와 같이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잔혹하고 거친 본성을 발견한다. 하리는 자신의 정신적이고 문명화된 것은 ‘인간’에 집어넣고, 모든 본능적이고 야성적이고 혼돈스러운 것은 ‘이리’에 집어넣는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서로 적대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에서 어떤 부분이 인간이고, 어떤 부분이 이리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리 또한 두 존재가 아니라 수백 혹은 수천의 존재로 되어있다. 사람은 세상을 바라볼 때 단순화하고 왜곡시키며 확실히 단정지으려고 하지만, 다양한 형식과 다양한 상태가 섞여있는 것이다. 평온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계를 두 개로 제한하고 영혼을 단순화하는 대신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 안에 더욱 많은 세계를 받아들여야한다.

수백 그루의 다양한 나무와 수천 가지의 다양한 꽃, 그리고 수백 종류의 다양한 과일과 약초로 가득한 정원을 상상해보자. 이 정원을 가꾸는 정환사가 ‘식용’이냐 ‘잡초’냐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식물학적 구분법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정원에 사는 가장 매혹적인 꽃들을 뽑아낼 것이고, 가장 고상한 나무를 베어낼 것이다. 황야의 이리는 자기 영혼에 있는 수많은 꽃을 그렇게 대한다. 그는 ‘인간’ 또는 ‘이리’의 범주에 맞지 않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리고 그는 어떤 모든 것을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 모든 비겁한 것, 모든 원숭이다운 것, 모든 어리석고 사소한 것은 단지 이리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강하고 고상한 것은 단지 자신이 아직 제압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리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하리 할러는 소논문에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고통스럽게 자각한다. 후반부의 수기에서 할러는 그 소논문의 영향을 받은 후 겪는 자신의 체험을 직접 전달한다. 할러의 주관적인 비전은 헤르미네, 파블로와 같은 인물을 만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한다. 특히 헤르미네는 그에게 춤추는 법, 웃는 법, 사는 법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려 하지만, 할러는 여전히 삶의 유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그리고 수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질투심에 못이겨 파블로와 동침한 헤르미네를 칼로 찔러 죽인다.

”(…) 하지만 하리, 솔직히 나는 당신에게 좀 실망했어. 당신은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내 작은 극장의 유머를 파괴해버리고 추잡한 짓을 했거든. 당신은 칼로 사람을 찔렀고, 우리의 아름다운 이미지 세계를 현실의 얼룩으로 더럽혔다고. 당신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어. 적어도 나는 당신이 헤르미네가 나와 함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으면 해.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이 체스 형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던 거야. 나는 당신이 그 게임을 더 잘 배웠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괜찮아, 이제라도 오류는 수정할 수 있으니까.”
(…) 아,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나는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으며, 내 등 뒤 어딘가에서 그의 섬뜩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삶의 게임을 위한 수십만 개에 달하는 모든 체스 말이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어렴풋이나마 게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다시 한번 게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고통을 다시 한번 맛보고, 그 무의미함에 다시 한번 전율하며, 내면의 지옥을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고 자주 통과하는 여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 나는 체스 게임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웃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헤세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할러가 삶을 배우기 위해서 했던 활동(댄스 교습, 축음기 구매, 가면 무도회 참여 등)들은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했다. 헤세는 1926년 댄스 교습에 참여했고, 3월에는 카니발 축제 기간에 가면무도회에 처음으로 참석하고는 자신이 30년 동안 인간 문제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가면무도회를 제대로 알지 못한 바보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해세는 1919년 스위스 몬타뇰라로 거처를 옮긴다. 몬타뇰라 산중은 겨울철에 추위가 참기 힘든 정도여서 헤세는 1924년부터는 겨울이 찾아오면 다시 바젤이나 취리히 같은 도시로 나가서 살았다. 헤세는 도시에서 친구들과 교류하고 특히 바젤에서는 다락방을 얻어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지난 몇 년간 고독자로서 자신이 향유한 자유의 삶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갖기도 했고, 젊은 시절 지식을 추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작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헤세는 말 그대로 ‘다 자란 어린아이’처럼 살고자 시도했고,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삶을 즐겼다. 이 시기에 헤세는 춤추는 법도 배우고 술집을 전전하는 것 외에 성적 해방도 상당히 향유했다고 한다.

헤세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우스꽝스럽게도 반은 인간이고 반은 이리인 한 인물의 이야기”이고 “먹고 마시기, 살인 등과 같은 단순한 일을 원하는 절반과 모차르트를 듣고자 하는 다른 절반으로 인해 장애를 겪고 삶이 불편한 인간이지만 결국에는 목을 매거나 유머를 배우는 대안이 있음을 발견하는” 인물이라고 적었다.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과, 본성에 가까운 모습 간의 갈등과 모순을 겪은 적이 있다면, 하리 할러의 이야기를 보며 그가 찾을 수 있었던 대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며 스스로에게 있는 모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기보다는 하리 할러의 체험, 경험을 따라가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생의 그럴듯한 의미, 딱 떨어지는 정의를 찾고자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정말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요즘에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더 좋은 퀄리티로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