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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회고에서도 언급했듯 올해 상반기에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었다. 침착맨 애청자여서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삼국지에 관련된 비유나 글을 보면서 언젠간 삼국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마침 시간이 나서 천천히 읽어보았다.

삼국지의 흐름을 보면서 모순적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한 각 군주, 장수들의 선택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재밌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시민이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라와 세력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싸운다. 고민과 야망의 범위가 나와는 다르지만, 여러 측면의 상황을 보면 각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런 점이 삼국지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

가장 크게 느꼈던 건 한 사람의 생이 큰 성과와 결실을 맺는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 점이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하여 뜻을 실천하고 삼고초려로 제갈공명을 품에 넣으며 세력을 키웠지만 결국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조조는 삼국시대 높은 위세를 자랑하며 천하를 호령했으나 적벽대전 이후 기세가 꺾여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손권도 마찬가지로 여러 전쟁에서의 맹렬한 기세와 덕은 칭송받았으나 또한 삼국을 평정하지 못하고 무덤에 묻혔다. 삼국지의 거의 모든 인물은 다른 영웅과 함께하며 큰 뜻을 이루고자 전심전력을 다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개인의 힘이 약해지며 결국엔 실패하고 만다.

그들의 뜻은, 그들의 의지는 세상에 남아 이어졌기에 각 인물의 삶이 의미 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유한한 삶 속에서 인생의 가장 높은 뜻을 추구했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능동적, 주체적으로 힘을 키우고 움직였으니까. 각 군주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았다. 본인의 손으로 최종적인 목표에 직접 닿은 게 아니라 해도 각 인물이 열정적으로 이뤄낸 것들과 그 인생의 가치를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

많은 군주들이 나이가 들수록 잘못된 판단 때문에 지켰던 것을 잃어갔다는 점은 슬프다. 표면상 명분은 있지만 단지 힘을 키우고 싶다는 야심이나 복수심을 계기로 벌어진 전쟁도 꽤 있었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또는 손권이 합비 공방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아쉬웠다. 꼭 전쟁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처한 상황 탓에 감정적으로 판단해서 기존에 추구하고 실천했던 것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는 게 가슴 아팠다. 나의 인생도 생각하는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다 할지언정 가능한 만큼 가치 있는 시도와 과정으로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범위하게 보면 올바른 대의를 따르고 실천하는 법을 고민하는데 도움되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손견이 영웅의 역할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손견은 한당, 조무, 황개와의 술자리에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대의도 어지러워져서 부끄러워해야 할 도적이 오히려 의를 내걸고 당당해야 할 관리들이 도둑으로 몰린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계속되면 백성들은 점점 어느 쪽에 옳은 명분이 있는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힘이 곧 대의가 되는 시대가 오고 마는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선 영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지향할 방향을 선택할 때에 가장 그럴듯한 목표와 의미를 가진 것 같은 방향을 고른다. 하지만 손견이 한 말처럼 정당한 이유보다는 힘이나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그럴듯한 대의와 명분은 다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정말 의미 있는 걸 해낼 수 있는 영웅을 구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삼국지에서는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하던데 영웅이 아닌 사람은 영웅을 어떻게 알아볼까? 각자만의 합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정신 차려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의를 따르고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은 진궁이었다. 진궁은 조조의 총애를 받으며 모사로서 함께 일했지만, 여백사 사건이나 서주 대학살, 또는 모종의 일 때문에 조조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여포 세력에 합류하여 조조를 공격한다. 하지만 진궁이 여포를 위해서 여러 계책을 내도 여포는 매번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반란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실패하여 여포의 곁에 머무른다. 그 후 여포는 조조에 공격당해 처형당하고, 진궁도 함께 최후를 맞는다.

진궁은 조조나 여포와 함께 있을 때 좋은 판단력과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주군이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눈감고 지나가지 않고 배신으로 응수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진궁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주군을 잘못 만나서 실패하고, 배신으로 미움받기도 했지만 부끄럽거나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떳떳하지 못할 바엔 자신이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처형 전 처절하게 항복했던 여포와 달리 진궁은 죽음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목표에 직접 닿지 못했더라도 그 사람이 인생에서 신념으로 지킨 것들의 가치를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는 점을 또다시 돌이켜볼 수 있을 것 같다. 진궁이 옳다고 생각했던 방향이 진짜 옳았든 그렇지 않든 권력자에게 동화되어 눈치보지 않고 주체적으로 당당한 길을 선택했다는 건 진정으로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삼국지의 각 일화나 인물을 분석하며 배울 수 있는 점은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인지 삼국지의 각 부분을 뜯어보는 책도 다양하게 있다. 실제 역사인 정사를 기준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조합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창작과 해석본이 나온다는 게 삼국지의 매력이기도 하다. 일단 삼국지연의부터 역사를 재구성한 소설이고, 나머지 책들도 서술하는 관점에 맞게 정사나 연의의 내용을 차용해서 새로 조합한 창작물이다. 그래서 궁금한 내용을 검색해보면 ‘정사는 이렇고, 연의는 이런데 여기는 이렇게 해석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하는 식으로 여러 측면에서 진심으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사건이라도 복합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함께 보면 더욱 흥미롭고 배울 점이 많다.

삼국지를 읽음으로써 관련된 글이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을 얻게 되어 좋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으면서도 관련 내용을 계속 같이 찾아보면서 읽었다. 책의 내용 중 더 알고 싶은 것을 위주로 찾아봤는데, 책을 읽는 것보다 궁금한 점을 검색하는 게 더 재밌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글곰님이 브런치에 올리신 삼국지 시리즈을 재밌게 봤다.)

정사와 창작물을 비교하는 관점에서 읽으니 창작물 속 인물은 작가의 의도대로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다. 정사와 연의의 차이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장비의 캐릭터성이었다. 연의에서 장비는 술에 취해서 실수하는 일이 많은 데 비해 정사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했거나 술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은 이유에 대해서도 실제 기록상에는 단순히 범강, 장달에게 살해당했다고만 나오고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있지 않다고 한다. 용감무쌍하면서도 단순하고 순진하다는 이미지는 오직 연의로 인해 만들어졌다. 정사에서는 지략을 구사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장비의 지혜로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런 점은 소설에서 약화되었다. 하지만 장비는 창작물에서 다혈질이긴 해도 정의로운 쾌남의 이미지로 비침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호감을 샀다. 이러한 인물은 삼국지가 집필되던 당시에 인기 있는 인물상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연의에서 실제 인물상을 새로 해석한 사례가 많다. 유비도 군주로서의 판단력과 카리스마보다 자애롭고 온화한 모습이 더 강조되었고 조조도 어느 면에선 유비에 대항하는 악역과 같이 단순하게 비춰진다. 손견이 화웅의 목을 따고, 간손미가 촉한에서 외교적으로 활약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것처럼 실제 업적이 있지만 다른 인물에 집중시키기 위해 작품에서 무능력하게 비춰진 인물들도 있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로 만들기 위한 문학적 표현으로는 덧붙일 말 없이 엄청났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관중 특유의 해석 덕분에 삼국지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될 수 있었겠지.

이런 부분을 보면서 작품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법과 실제 장수로서 좋게 평가되는 법이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로 볼 때는 그냥 구경하는 데에서 멈추니 상관없지만 실제로 나라를 이끌고 앞장서 싸우는 장수로선 어떤 성격의 인물이 가장 믿음직할까? 당연히 백성을 위하고 전쟁에서 잘 이길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 믿음직한 주군이고, 그 군주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잘 받쳐주는 것이 이상적인 조력자일 것이다. 장비도 그런 관점에선 훌륭하게 활동했을 텐데, 단지 이야기로서 많은 이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는 뜻일 거라 생각한다. 인물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여러 사람에게 괜찮게 평가되는 건 힘든 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오랜 기간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인생에서 즐길 수 있는 큰 컨텐츠 중 하나를 경험한 느낌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부딪히는 과정을 따라가는 게 정말 재밌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삼국지에 대한 대화를 쉽게 할 순 없지만, 이 정도면 삼국지 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될 것 같다. 관련해서 읽거나 즐길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서 더 일찍 읽었다면 좋았겠다 하는 마음도 있다. 앞으로도 삼국지에 관련된 책이나 비유가 나오면 관심을 가지고 찾아봐야겠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