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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대하여

책상 위에 물을 한 잔 따라놓았습니다.

컵에 담긴 물속에는 무수한 분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부 분자들이 멈춰있는 상태라도 어떤 분자들이 움직이면 다른 분자도 흔들리게 되고, 분자들의 요동이 확장되어 서로 충돌하고 밀어냅니다. 각각의 분자들은 일정한 규칙 없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물 위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잉크가 물에 떨어지고 나면, 잉크를 구성하는 분자와 물을 구성하는 분자가 계속 움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배열을 만들 것입니다. 잉크를 떨어뜨린 컵 안의 분자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분자들이 퍼져있는 모양은 지금이나 1분 후나 똑같이 무작위입니다.

하지만 그 컵을 바라보는 우리는 잉크가 점점 퍼져서 고르게 희석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컵에 떨어진 잉크는 물 안에서 흩어지면서 시간이 지난 후 물과 완전히 섞이게 될 것입니다. 각각의 분자들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어도 잉크가 섞이는 건 그 분자들을 멀리서 바라봤을 때 뻔하게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물 분자는 자신이 잉크와 섞이고 있든,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든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저 요동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분자의 혼란스러운 움직임도 자신이 모르는 어떤 경향성을 불러온다는 사실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멀리서 봤을 땐 당연히 변화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거리를 두고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면 그 변화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조목조목 따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작은 구성원들은 그것을 위해 움직인 게 아닐 수도 있고, 뭐가 변하고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바라볼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고 수많은 변수가 있는 상황에서 전체를 알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분자로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도 넓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기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진동하고 충돌하는 사건들이 모이면 어디든 기울어지는 방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면 하나의 분자로서 열심히 움직이는 게 최선이겠죠. 그리고 계속해서 나의 방향을 알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다보면 내가 알든 모르든 어딘가엔 다다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