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마의 평전

사마의(司馬懿, 179-251)는 후한말과 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이자, 진나라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인공인 제갈량과 맞서는 라이벌 역할로도 유명하다.

사마의가 태어날 무렵은 후한 시대가 말기에 접어들며 황권의 약화와 환관-외척들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조조는 여러 군벌을 제압하고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조조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데도 공을 들였는데 그중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 지켜본 인물중 하나가 바로 사마의였다.

사마씨는 한나라를 건국한 공신의 명문가였고,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은 한나라의 고위관료를 지냈으며 정직하고 공정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방의 8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사마의는 어릴때부터 수재로 이름을 떨쳤다. 조조 진영에서 최고의 인재로 꼽혔던 순욱과 최염 등도 일찍부터 사마의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조조에게 등용을 추천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의 등용을 번번이 사양했다. 당시 정당한 사유없이 나라에서 내린 관직을 거절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다. 의심많은 조조는 사마의가 정말로 아픈지 감시하게 했고, 그럼에도 사마의는 조조를 속이기 위하여 집안에 은둔하며 치밀하게 환자 행세를 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속였다. 조조가 사마의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이는데는 무려 7년을 기다려야했다. 조조는 두 번째로 사마의에게 손을 내밀며 “이번에도 응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강하게 통첩을 날렸다. 사마의는 결국 29세의 나이에 조조가 내린 관직을 받아들여 출사하였다.

처신을 지킨 첫 계책

사마의의 출사 이후 유비가 파촉 땅을 점령하고 복황후가 암살 음모를 꾸렸다 들켜 수백명이 처형하는 등, 허도 정권의 외내부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사마의의 자취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마의에 대한 조조 진영 인사들이 장차 후환이 될 수 있는 인재인 사마의를 경계, 견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사마의는 이후 215년 조조의 한중 정벌에 책사로 종군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그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한중을 정복하고 난 직후, 사마의는 조조에게 기세를 몰아 바로 이웃 지역인 서천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중은 서천과 중원을 잇는 최대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사마의는 당시 서천을 장악한지 얼마안되던 유비가 세력을 회복하면 조만간 한중을 공략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천하통일이 기약없이 늦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image

하지만 조조는 등롱망촉(得隴望蜀)이라 하여, 굳이 파촉 땅까지 바랄 필요가 없으며 군사들이 지쳐있다는 이유로 사마의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의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조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물러선다. 그리고 훗날 사마의의 혜안대로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며 촉한을 건국하게 되면서 조조의 천하통일은 물거품이 되고만다.

이 때 사마의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이유는 조조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느껴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나은 처세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사마의는 인내심은 극도로 뛰어났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고집을 부리거나 모험을 걸지 않으며 유연하게 처신했다.

사마의의 전략적 승리

219년 유비의 맹장인 관우는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조조가 있던 수도 허도를 위협한다.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하여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배후의 손권을 회유하여 관우를 협공하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사마의는 유비와 손권의 동맹관계가 실제로는 불안정하며, 손권이 형주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관우와의 사이가 좋지않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조도 사마의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사마의의 계략은 성공하여 219년 12월, 손권의 기습으로 관우는 형주를 잃었고 본인도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이에 크게 분노한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손권을 공격하지만 이릉대전(夷陵之戰)에서 참패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었다. 유비 본인도 얼마 지나지않아 223년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로 삼국시대는 ‘1강(위나라)-2약(촉한, 오)‘의 판세로 굳어지게 된다. 사마의의 책략 하나가 삼국시대의 판세를 결정지은 것이다.

비로소 능력을 인정받은 사마의는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비는 결국 껍데기만 남아있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사마의를 견제했던 조조와 달리, 조비는 스승이었던 사마의를 측근으로 우대하여 여러 요직을 맡겼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

226년, 조비가 재위 6년만에 사망하면서 사마의는 진군, 조진 등과 함께 후계자 조예를 보좌할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지명되었고, 표기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르며 명실상부한 위나라 조정과 군부의 실세로 등극했다.

그 무렵 삼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창업군주 유비가 사망한 이후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던 촉한은, 재상 제갈량이 황제 유선을 보좌하여 국정을 맡아 국력재건에 성공한다. 제갈량은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왕업불편안(王業不偏安, 한나라의 적인 위나라와 양립할수 없고, 국토가 일개 지역에 머물러서는 안된다.)이라는 국가 이념을 내세워 위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북벌’을 추진했다.

『삼국지연의』의 후반부에서 이 사건은 제갈량과 사마의의 라이벌 구도로 부각되어 설명된다. 하지만 실제 『삼국지』 정사를 보면 제갈량이 북벌에서 맞서싸운 상대는 사마의만이 아니라 조진, 장합, 학소 등이었다. 심지어 사마의는 첫 번째 북벌에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그가 직접 군권을 쥐고 제갈량과 상대하기 시작한 것은 후반부인 4,5차 북벌 정도다. 연의나 드라마 등에서 묘사된 두 사람의 현란한 심리전이나 공성계, 상방곡 전투 등 극적인 장면들의 대부분은 후대의 창작이다.

연의는 주인공인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마의를 제갈량의 책략에 번번이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사마의가 역사상 제갈량과의 두 차례의 야전에서 격돌하였을 때 모두 패배하여 이긴 기록이 전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고 사마의의 수성은 성공했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했던 군사 전략은 ‘참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마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장거리 보급이 어렵고 유능한 인재도 부족하다는 촉군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촉군이 이동할 길목하고 요충지를 미리 점령하여 장기간 대치하는 농성전을 펼쳤다.

초조해진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사신을 통하여 여인의 옷과 장신구를 보내며 도발한다. 이는 수비만 하는 사마의가 여인처럼 소심한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고, 당대 남성들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심리를 간파한 사마의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의는 사신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걱정하는 척 근황을 물으며 그가 잠도 자지않고 잘 먹지도 않으며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마의는 이를 듣고 자신을 혹사하는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다고 하며, 식소사번(食少事煩)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다.

image (이걸 대놓고 전하는 사신이 눈치없는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사마의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공명은 큰 뜻을 품었지만 기회를 보는 눈이 없고 모략에는 뛰어나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며 전투를 즐기지만 임기응변에 능력이 없다”고 평가하며 “지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지만 이미 나의 계책에 빠진 상태다. 그는 이제 패해 물러가게 될 것이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사마의의 이러한 평가는 제갈량의 능력과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의 전황은 모두 사마의의 예언대로 실현되었다. 연의의 영향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에 비하여 한 수 아래이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심리를 유일하게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호적수였다.

사마의의 쿠데타와 그 이후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 사마의가 승전 장군이 되고 제갈량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위는 조조-조비-조예의 시대를 거쳐 4대 황제 조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마의는 일부러 아픈 척을 하여 조상 일가의 경계를 늦추며 기회를 보았다.

249년 실권자인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수도를 비운 틈에 사마의는 정변을 일으켜 정적들을 몰살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이 사건이 바로 위나라의 몰락과 사마씨 정권의 등장을 알리는 고평릉사변(高平陵之變)이다.

사마의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과 나라를 배신했고, 후대의 평가를 우려하여 본인이 직접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계자들에게 찬탈의 기반을 마련해줬다. 그가 수립한 사마씨의 권력은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그리고 손자 사마염에게 계승됐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대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잔인하게 숙청하였다.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뒤 불과 2년만인 251년에 사망했다. 이후 사마씨 정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촉한은 사마씨 정권에 의하여 263년 가장 먼저 멸망했고, 265년에는 위나라가 멸망하며 진이 건국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280년 오나라마저 정벌하여 100여년에 걸친 난세를 끝내고 통일을 이뤄낸다. 사마의는 사마씨 후손들에게 고조(高祖 宣皇帝) 황제로 추존되며 결국 자타공인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의 후손들이 세운 진나라는 건국 과정에서의 온갖 모순과 부족한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명했고, 이후 중국은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또다른 난세에 휘말리게 되며 진의 삼국통일은 그 의미가 빛이 바라게 됐다.

사마의에게 배울 점

”겸손하고 또 겸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의가 생전에 남겼다는 어록이다. 사마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듯이 본질을 꿰뚫어 보려 했고, 행동해야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나서 결과를 쟁취했다.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사마의의 인내력과 처세술을 본받을 수 있다.

책에 대한 생각

지난번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서 평전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이나 결론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어온 다양한 경험과 선택,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이 좋았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다른 책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평전을 또 읽어보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이 책을 찾게 되었다. 평전은 그 인물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의 다양성과, 그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마의는 발자크에 비해서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내용의 구성이 다른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인물이 한 행동의 의도가 임의로 추측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시대의 차이를 생각하면 감안해야하는 부분이고 사마의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좋았다.

이 책 속에서는 주로 사마의가 연의에서 제갈량과 라이벌 관계로 등장하면서 폄하된 측면에 대한 재평가가 강조되었다. 하지만 나는 『삼국지연의』를 뒷 부분까지 읽어보지 않아서 연의에서의 이미지가 어떤지 모르는 상태로 읽게 되었다. 다음에는 연의나 제갈량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사마의 입장의 이면에 있는 내용도 함께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전투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찾아보면서 삼국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여러 인물이 처한 복잡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이래서 이렇게 행동했었나,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다양한 분석과 의견을 펼칠 수 있다는게 재미있다. 사람들이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유도, 삼국지가 인생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해하게 되었다.

삼국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이 읽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지만 나도 삼국지 애호가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찾아봐야겠다.. ㅎㅎ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