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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시지프는 길고 고통스러운 노력 끝에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굴려 올린 돌은 순식간에 저 아래 골짜기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이제 또 다시 그 골짜기 바닥에서 정점을 향해 돌을 굴려 올려야 한다. 그는 들판을 향해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부조리는 이 ‘의식’에 의해 발견된다. 카뮈는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삶에 대해 ‘의식’하는 순간에 권태의 느낌과 의문이 드는 것이라 말한다. “가장 잘 준비된 삶 속에서 무대 장치가 무너져 버리는 한순간이 항상 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과 저것을 원하며 무엇 때문에 이 여자, 이 직업을 선택하며 무엇 때문에 이토록 미래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하는가? 대개의 경우 삶은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삶 속에서 가장 먼저 오는 질문은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부조리라는 극한의 “사막”이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점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가이다. 카뮈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그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거부한다. 각 귀결에 대해서 카뮈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그 명확함에 대한 호소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메아리친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만이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 인간의 필사적 열망이나 호소, 인산이 자신 속에서 부단히 느끼는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 열망과 호소의 치열성이 더하면 더할수록 세계의 무심한 침묵과 저항은 더욱 강하고 요지부동으로 느껴진다. 카뮈는 이 부조리에 꼭 매달리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한 자명함이며, 단단하고 뜨거운 접점의 창조이며, 명철한 의식이고 자기 해방이다. 그는 자신의 매일과 반항을 통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한다.

  •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다. 나의 운명인 죽음은 영원한 자유에 대한 나의 모든 기회를 말살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행동의 자유’를 되돌려주고 앙양시켜준다. 부조리가 이 점에 관해 나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희망과 미래의 박탈은 곧 인간의 정신적 개방성의 증대를 의미한다. 나의 깊은 자유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밑바닥 없는 확실성 속으로 몰입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느낌으로써 삶을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원리이다.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사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믓미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이끌 수 있다.

  • 비약하기 전의 미묘한 순간, 현기증 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자의 뜨거운 열정, 이 정면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합리와 통일성이 결여된 세계에서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의식의 날을 세워 가지고 있는 한 영혼 앞에 놓이는 현재 그리고 줄지어거 지나가는 수많은 현재들,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때 이상이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실 그것은 부조리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그의 추론의 세 번쨰 귀결에 불과한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비인간적인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여정의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찬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부조리를 회피하는 방법으로는 희망과 자살 두 가지가 있다. 그는 희망과 자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 그가 말하는 희망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은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이다. 카뮈는 희망을 도피, 치명적 회피, 동의, 기권, 비약, 또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규정한다.

  • 부조리의 경험은 자살과는 먼 것이며, 자살은 반항의 논리적 귀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 존재하는데 그 대립의 항목 중 어느 하나(인간의 열망)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살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죽음과 더불어 부조리도 ‘끝이 나기’ 때문이다. 자살은 부조리의 ‘본질’을 소멸시키므로 그 귀결 혹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그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자살이 적절한 결말이 되지 못한다먄 남은 것은 반항과 통찰력을 간직한 채 인간의 삶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한 여러 인간을 분석하고, 삶의 구체성, 육체, 감각에 바탕을 두어 소설을 창조한다. 세계와 정신의 갈등은 그에 대한 의식으로 이뤄지므로, 그것을 항상 새로이 견지하고 긴장을 유지한다. 카뮈는 카프카의 재판, 성 등의 작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카프카는 그의 신에게서 도덕적 위대성, 자명함, 선,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품에 좀 더 확실하게 뛰어들기 위해서다. 부조리를 확인하고 받아들이고나서 인간은 거기에 자신을 내맡겨 버린다. 이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부조리의 인간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인간 조건의 한계 안에서, 이 조건을 벗어나게 하는 희망보다 더 큰 희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로부터 실존 사상이 희망으로 다져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뮈는 부조리를 통해 삶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부조리를 건강한 반항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겠지. 어찌보면 부조리하다고 취급해버리는 것이 심한 단순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상당히 동의되는 부분도 있다. 나든 다른 사람이든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그리고 합리적이든 말든 나는 그걸 객관적으로 판단할 주체가 못 된다는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비관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비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비관적이면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나의 모순적인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큰 자유도가 주어져서 그런지 가면 갈 수록 이런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이젠 내가 잘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거리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다. 긴장과 거리를 가지고 바라보고 싶다. 인생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생각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과 비슷한 결의 무언가일까? 기분이 별로인 걸 보니까 잘 살고 싶은 필사적 열망은 아직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나는 돌을 굴려야하고, 돌이 언덕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겠지.